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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산 연씨의 유래

시조(始祖)는 연계령(延繼岺)이시다. 1123년 송 휘종 계묘생 이시고 중국 하남성 홍농인(中國 河南省 弘農人) 이시다. 관작(官爵)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신호위상장군 판도판서(神號衛上將軍.版圖判書)를 역임 하시였다고 한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 이시다. 1196년 3월 10일 돌아가시다.(이 사실은 萬姓譜에 기록 되여 있음.)

중국사기에 보면 우리 연씨(延氏)가 많이 있으며 그중에도 후한의 연 독(延 篤). 당나라의 연새명(延璽明). 연 상(延 尙) 같으신 분들은 큰 벼슬을 하신 분들이며 중국 국회위원인(본토출신 중화민국) 연국부(延國府)씨가 80년에 한국을 다녀간 바 있음.) 송 (宋)나라 홍농은 중원 황화유역 지금의 휘경부(輝慶府)이다.

2세. 연 한공(漢 公.) 1147년 송 고종 정묘생 이시고 관작은. 금교태자담사(官爵은 檢校太子 儋事.) 중서 시랑(中書 侍郞) 동 중서문하 평장사(同 中書門下 平章事)의 벼슬을 하시고 1212년 송 영종 9월 28일 돌아가시다.

3세. 연 성(延 惺). 1172년 송 효종 임진생 이시고 삼사사(三司使) 지 추밀원사(知 樞密院事)문하시랑. 병부상서(門下侍郞 兵部尙書) 등의 벼슬을 하시고 1241년 송 리종 2월 11일 돌아가시다.

4세. 연 경 보(景 輔). 1190년 송 효종 경술생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주국(上柱國) 좌금오위 대장군(座金五衛 大將軍) 등의 벼슬을 하시고 1249년 송 리종 9월 15일 돌아가시다.

5세. 연 회(延 誨). 1211년 송 영종 신미생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부시랑(吏副侍郞) 이부상서(吏部尙書) 산원동정(散員同正) 등의 벼슬을 하시고 1261년 송 리종 4월1일에 돌아가시다.

6세. 연 세 린(世 麟). 1235년 송 리종 을미생으로 정순 호조전서(正順 戶曹典書)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 하시였으며. 시호는 장열공(壯熱公을) 받시였다. 1274년 송 탁종 10월 9일 돌아가시다. 이상은 중국의 선조이시다.
(중국 몽고는 1189년 태무진(1162~1227)이 칸이되고 1206년 태무진이 몽고를 통일하고 칭 키스칸이 되었으며 1271년 국명을 원(元)이라 개칭하고 1388년 명(明)에 의해 멸망함. 17왕의 183년간.)


2) 7세. 관향시조(貫鄕始祖.한국에 오신 시조) 수창(壽 菖)선조.

한국에 오신 연수창 선조께서는 전술 한 바와 같이 원래 중국 하남성 홍농인이시다. 송이 쇠하여 남쪽으로 천도하여서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고 있을 1256년 병진년에 몽고가 중국을 거의 통일한 시기에 홍농에서 태어나시었다. 몽고(蒙古)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서 귀국도중 살해된 일을 구실삼아 1231년 고려를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함으로 고려 제 23대 고종은 1232년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고(바다를 몽고가 두려워 함으로) 항전을 계속하다가 마침내(국내 정세가 극도로 혼란 하였음.) 고종46년인 1259년 대자(24대 원종)가 몽고에 볼모로 가있는 조건으로 일시 화친하고 개경으로 귀환하였다. 그 해 고종이 병으로 승하 하자 즉시 태자가 환국하여 제 24대 원종이 되었다.(1259년)
(고려의 무인시대 100년(18대 의종24년 1170)은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등이 40년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 최씨4대가 60년. 최의는 정국이 혼란중인 1258년 문인 류경과 무인 김준에 의하여 피살됨으로 90년간의 무인시대는 막을 내린 정권은 국왕에게로 돌아갔으나 강화에 설치됐던 삼별초 즉, 마별초, 야별초, 전투초 등은 항복에 불복하고 진도로 이동하여 항몽전을 계속 하다가 끝내 제주도에서 원군과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몽고가 중국을 완전 장악한 1260년 고려는 원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이때, 원종의 태자인 충열이 볼모로 잡혀가 1272년 원종14년 원의 제6대 세조(世祖 1259~1294)의 딸인 제국 대장공주(齊國 大長公主)와 정략적 결혼을 했다. (당시 고려인의 복장, 의식, 관제, 심지어는 왕위 계승 조차도 원의 뜻에 따라서 결정되었음. 즉 부마국이 됨으로 이후 역대왕비는 몽고의 귀인들이었다.)

1274년 원종이 승하하자 충렬은 왕위계승을 위해 10월 고려에 환국했다. 이때 원의 문하대장군(門下大將軍)이신 수창(壽菖) 선조께서 공주를 천사(天使)로서 배종(陪從)하시어 11월 고려로 건너오신 우리 곡산 연씨의 선조이시다. (공주의 신변 보호와 권위의 상징으로 천사로서 배종하시었음. 옛날 우리 한국 양반들도 시집가는 딸에게 남녀 종을 딸려 보내었으며, 성경에도 여종을 딸려 보낸바 있다.)
고려에서의 관직과 품계는 은자광록대부이시며 임직은 금교상서 좌복사야(정2품)이시었다. 곡산에서 여생을 지내시다가 1319년 제27대 충숙왕 6년 기미년 10월 9일에 돌아가시었다. 산소는 곡산군 백야산 하 개미대 건좌에 합붕했으며 표석이있다.(1994년 10월 25일 서울시 도봉구 하계동 선영이 아파트 단지로 정부에 수용됨으로 선영(先塋)이 충북 괴산군 도안면 화성리 명암동 뒤산으로 이장(移葬)을 모실 때 신단비를 모시었다.)


3) 본관지 곡산(谷山)의 연혁 (本貫地 谷山의 沿革)

곡산은 황해도 동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개성에서 금청군(옛 우봉)과 신게군을 지나 보통 1,100에서 1,200m의 산들로 둘려있는 산골이다. 동은 강원도 이천군(伊川)이고 서는 황해도 수안군이며 북은 평남, 성천군과 양덕군이다.(옛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던 (명종14년 1559~17년 1562)본거지이기도한 궁벽(窮僻)한 곳이다.)그러나 신라 때에는 고성군(古城郡), 또는 곡주군(谷 州)이었고, 고구려 때는 십곡성(十谷城) 또는 덕돈홀(德頓忽) 곡 성(谷城) 이었으며, 고려 제6대 성종시는 방어사(防禦使)를 14대 헌종시는 지 주사(知州事 현 도지사격)를 두어서 침공을 방어하는 요지였다. 이조 태조시는 부(府)로 승격하였다가(태조의 계비는 곡산 강씨임) 후에 지금의 곡산군으로 됨. (곡산을 본관으로 하는 주요 성씨는 延, 康, 盧, 韓 씨 등이 있다.)


4) 씨족사의 개요(氏族史의 槪要)

연수창(延壽菖) 선조께서는 1297년 5월(고려에 오신지 24년)에 제국 공주가 세상을 떠나자(충열왕비) 벼슬을 내 놓으시고 몽고로 돌아가고자 하시었으나 충열왕의 간곡한 만류로 고향쪽인 당시 가장 군사 요충지인 곡산에 잉거(仍居)하시니 이로써 곡산이 우리 연씨의 관향지지(貫鄕之地)가 되었다.

8세. 연 경(延 鏡) 초휘(初諱)는 약증(若曾)이시고 자(字)는 노이(魯而)이시며 호(號)는 암곡(巖谷)이시고 문과에 급제하시었다. 벼슬은 삼중대광 문하시중(門下侍中) 태사(太師) 부위(副尉) 증 태위(贈 太尉)이시고 학행이 뛰어나시어 문집이 전하여지고 있다. 산소는 역시 곡산군 백야산 하 개미대 건좌에 합봉 했으며 표석이 있다. 1344년 고려 제28대 충혜왕 원년 7월 3일 돌아가시다. (1994년 10월 25일 충북 괴산군 도안면 화성리에 신단비를 모시었음.)


암 곡 시(巖谷詩) 금사사(金沙寺) 제영(題詠)
금사사란 절 이름을 지으시고 부르시다.


寺在 水窮 山盡處(사재 수궁 산진처.)(원본에 盡字와 處字는 略字와 古字로 됨)
절은 물이 궁한 산골에 자리 잡았구나.

白鷗 黃鶴 共批徊(백구 황학 공비회)
백구와 황학이 서로 얼려 노는 구나.

鯨波 接戶 靑雷壯(경파 접호 청뢰장)
큰 파도 집을 치니 맑은소리 우레 같고

沙岸 連軒 晩雪堆(사안 련헌 만설퇴)
모래사장 처마 끝에 눈 더미인양 쌓였어라

風裡 緣琴 松籟發(풍리 연금 송뢰발)
바람결에 거문고소리 솔잎이 불어내고

雨中 紅錦 海棠開(우중 홍금 해당개)
비 내리는 강 언덕엔 해당화가 피는 구나

阿郞 有홍 同古今(아랑 유홍 동고금)
아랑에 유홍은 옛과 이제가 같으려니

探勝 流人 趁末迴(탐승 유인 진말회)
찾아올라 노는 사람 돌아올 줄 모르네


9세. 연 조(延 祚)1303년 충열왕 29년 계묘생으로 벼슬은 음보(蔭補)로 좌우위 산원(左右衛 散員)이시고 여러번 승차하시어 동정(同正)등에 오르셨고 증손이신 정후공(靖厚公)께서 1401년 충익대 좌명공신(忠翊戴 佐命功臣)이 되심에 증조부이심으로 태종께서 자헌대부호조판서(戶曹判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弘文館, 藝文館, 大提學) 경연의금부사(經筵義禁府使)를 증직하시었다.
시조 할아버지(연수창)때부터 사시던 정든 곡산을 떠나서 화주(和州. 지금의 함흥 옆 영흥)으로 이거 하시어 사시다가 1354년 공민왕 3년 10월 10일 돌아가시다. 산소는 함흥부 원평사 우쌍동(일명. 산귀동) (咸興府原平社) 계좌 합봉(癸坐 合封)표석이 있음.
(1994년 10월 25일 충북 괴산군 도안면 화성리 선영에 신단비를 모시었음.)

참고. 이자춘(李子春) 1170년 고려 제 18대 의종 24년 무신란의 주동자 이의방의 삼형제 중 막내인 이 린(문극겸 대부의사위)이 문신으로써 무인 정권을 비판 하고서 행방불명이 된바 있다. 이때 이 린이 전주로 가서 은신하여 살았고 그의 손자인 자춘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전주이씨의 시조)가 당시 그곳 지주(知 州. 현 도지사)와 개인적인 사이가 나빴던 관계로 위해를 두려워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얼마 후 전주 그 지주가 삼척으로 부임하여 오게 됨으로 보복을 두려워하여 온 가족이 간도(여진족의 땅)로 가서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관)가 되었고, 그 뒤 그의 아들 이행리가 또 그 손자, 이자춘이 두만강 주변의 천 호가 되었다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가 있는 화주(영흥)의 천호가 되었다. 이 무렵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가 쇠퇴 하여 감을 틈타 실지 회복 운동을 강해 할 때 원나라 천호인 이자춘이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 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어 그 지방의 만호 겸 병마사에 임명 된 바 있다. 이러하여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22세시에 습작(襲爵)하여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다.(참조. 한국성씨대관)

10세. 연 단 서(延 丹 瑞)
1322년 충숙왕 9년 임술생으로 무술이 출중한 장군으로 추 충양절 좌리공신(推 忠良節 佐理功臣)이시고 조의대부(朝儀大夫) 검교 금오위 대장군(檢校 金吾衛 大將軍)으로 계시면서 1364년 여진의 삼선, 삼개(三善, 三介)가 고려에 침입하여 함부를 함락하고, 북방에 여러 고을을 탈취 노략질이 극심함에 이에 고려 정부에서는 지휘사 한방신, 병마사 김 규, 등과 같이 대장군으로 춘전 하시여 화주(영흥 永興)를 회복하시고 여진족을 선출령(滿洲北方)까지 축출하는 큰 전공을 세우심으로 공민왕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시고 공신(功臣)으로 봉하시게 되었다. 1380년 우왕 6년 1월 2일 돌아가시었고, 역시 정후공의 조부(祖父)이심으로 이조 태종(太宗)께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종1품)의금부사(義禁府使)의 벼슬을 증직 하시었다.(산소는 함흥 선영하이시며, 1994년 10월 25일 충북 선영에 신단비를 모시었다. 아드님 주(住)선조 한분과 따님 한분이신데 여서(女壻)는 정유(鄭裕) 관 직) 장 동정(官 直長 同正)밀직부사(密直副使)이시고 포은 정몽주 선생(圃隱 鄭夢周先生)은 외손이시다.

11세. 연 주(延 柱) (1342년~1411년)
주(住) 자 할아버지께서는 고려 28대 충혜왕 4년(1342.임오년)에 곡산에서 출생 하였으며 공민왕 1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었고 벼슬은 삼사 좌사와 금교 남경 한성부윤을 역임하시었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 곡성군(谷城君)에 책봉되시었다. 그러나 공께서는 고려 말의 정사가 쇠퇴함을 보시고 벼슬을 버리시고 향리로 은거(隱居)하시어 고려조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절(志節)을 굳게 지키시었다. 조선조의 이태조(李太祖)가 여러 차례 벼슬을 받으라고 부르셨으나 끝내 불응하시었다.
1401년 차남이신 정후공(靖厚公)께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되심에 이조 제3대 태종께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佐贊成)겸. 경연사 판의금부서(經筵事判義禁府事) 곡성군(谷城君)에 피봉(皮封)되시었고, 태종 11년 신묘년(1411년) 10월 1일에 돌아가시었다.(산소는 함흥 선영에 합봉으로 모시었다. 1994년 10월 25일 충북 괴산군 도안면 화성리 선영에 신단비를 모시었다.)

초취. 배위는 정주군 부인 온양 방씨이시며 대호군 온유량의 따님이시고 조부는 태자사, 문의공, 오 순이시며, 증조부는 온천부원군이신, 온 언휘 이시다. 장자이신 사걸 선조께서는 정주군 부인 온양 방싸의 소생이시다.
재취. 배위는 정주군부인 정쥐 최씨이시고(정주는 지금의 풍덕이다.) 고려 충열왕의 부마이신 최 인저의 따님이시다.(산소는 함흥 선영에 합봉으로 모시었고) 차자 사종. 셋째 사준. 넷째 사화, 선조께서는 재취이신 정주군부인의 소생이시다.

주(柱)자 선조께서는 네 분의 아드님이 계시었는데 맏 아드님은 사걸(嗣傑) (12세) 초휘는 천종(天宗)이시고 관은 중랑장(中郞蔣)이시다. 배위는 남양 홍씨이시다.(산소는 함흥 선영이시다.)
장손(13세)이신 연 행윤 선조께서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셨으며,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정주 이씨 이시었으나 무후 하시여 절손 되시었고 산소의 기록은 없으나 함흥 선영하라 사료된다.



주(住) 자 (11세) 선조께서는 네 분의 아드님을 두시었는데 장자(長子) 사걸(嗣傑) 중랑장(中郞蔣), 둘째 사종(嗣宗) 곡산부원군, 셋째 사준(嗣俊) 이조판서 넷째 사화(嗣和) 좌승지이시다. 장자 사걸선조(嗣傑先祖)에 대하여는 앞에 설명하였음으로 여기서는 둘째 곡산부원군에 대하여 고찰(考察)하기로 한다.

1380년(우왕6년) 가을 고려 도총주외제군사 이성계장군이 곡성군을 여러 차례 부르나 불응하시고 대신 둘째인 사종선조(어려서부터 범상(범상)치않음 당15세)을 보내시어 학문과 무예를 닦게 하시었다.(이성계장군은 세교지간의 자제임으로 문하에 두고 아들과 같이 사랑하였다고 한다.) 1381년(16세) 산원(散員 정8품)이 제수 되시고, 1385년 우왕11년(20년) 별장에(정7품)진급하시였고, 1388년 우왕14년(23세) 고려가 요동(遼東)을 공략(攻略)할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이성계장군 휘하에 종군하시여 위화도 회군시에는 공이 이성계장군을 조석(朝夕)으로 좌우(左右)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보좌(補佐)하시였음으로 랑장(郞長)이 되시고 1392년(태조원년) 원종공신(原從功臣 10월)과 회군공신권(回軍功臣卷 12월)이 내려지고, 1398년 태조7년 9월 보공대장군(保功大將軍 33세)에 승차(陞差)되시었다.

참고, 조선왕조의 성립(朝鮮王朝) 고려 제31대 공민왕 8년(1359)과 10년(1361)의 2차례에 걸쳐 홍건족(紅巾族)의 침입이 있어 한 때 개경이 점령되고 왕은 안동까지 피난 한 바 있으며 이후 한편 무장한 왜구(倭寇)는 함선을 타고 다니며 해안 일대의 노략질이 극심하여 농민과 어민들은 생활 터전을 버리고 내륙으로 도피하는 등 극도로 정세가 불안 할 때 정권을 잡은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친명정책을 버리고 다시 친원 정책을 채택함에 이에 불가함을 이성계, 정몽주.(회군 후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장 조영규에 의하여 피살됨)등이 주창하나 이인임의 뒤를 이은 최 영장군이 명을 정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1388년(우왕14년) 요동정벌(遼東征伐)을 위하여 최영(崔榮)이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출정하였다. 이 때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이성계장군이 위화도에서 반기를 들어 조민수를 참하고 회군하여 창왕을 폐하고 최영을 베고 1389년 제 34대 공양왕(恭讓王 제20대 신종의 7세손)을 옹립하였다가 1392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성립함.

무인난 1389년 태조(太祖 1392~1398)가 개국에 공로가 큰 제일왕비(신의왕후 한씨)의 소생 6형제를 제치고 제2왕비 신덕왕후 강씨(강)의 소생 의안대군 제8왕자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제5왕자 방원(芳遠)이 반발하여 무안대군 방번과 세자방석 그리고 이를 적극 주장한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을 죽임으로 태조는 제2대 정종(정종 제2왕자 방관)에게 양위하고 함흥으로 은거하다.(이후로 함흥차사(差使 가면고만)사건이 1402년까지 수차례에 있었다.)

1400년 정종이 보의용양대장군(保義龍驤大將軍)에 승차케 하시고 제4왕자 방간의 난에 회안대군 방간(懷安大君芳幹)을 귀양 보내고(귀양지에서 병사) 이를 부추긴 역신 박포(朴苞)를 잡아 난을 평정케 함으로써 태종의 등극을 적극 도운 공로로1401년 태종(太宗) 원년에 충익대 좌명공신(忠翊戴 佐命功臣)에 봉해졌다.
(이 때 태종이 아아, 그 옛적부터 도와주며 보필함이 가상(嘉尙)타 하고서 공의 선대를 추증(追贈)하고 한편 후손을 위하여 전지(田地)를 하사 하면서 은대(銀帶)하나와 옷감 한 벌 그리고 말 한필을 내리었다.)